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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종교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두고 천주교·불교 갈등 조짐

등록 :2021-09-15 14:35수정 :2021-09-15 20:43

광주시·천주교, 광주 순례길 추진
불교계 “남한산성은 호국불교 구심점
특정 종교 성지화 중단하라” 반발
천진암 성지에 세워진 거대한 ‘세계 평화의 성모상’.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천진암 성지에 세워진 거대한 ‘세계 평화의 성모상’.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경기도 광주시와 천주교 수원교구가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잇는 광주 순례길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적인 순례길로 활성화하기로 한 데 대해 불교계 등이 반발해 종교 간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불교와 가톨릭은 대외적으로 교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터라 이 문제가 양 종단의 화해를 깰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이번 사안은 광주시와 수원교구가 지난달 26일 수원교구청에서 신동헌 광주시장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불거졌다. 광주시와 수원교구는 “천주교 관련 역사적 명소인 남한산성 순교 성지와 천진암 성지를 잇는 광주 순례길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해 ‘천진암 성지 광주 순례길’ 조성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협약에 따라 광주시는 순례길 조성과 유지 관리, 성지 순례 활성화를 위한 행정적 지원을 하고, 수원교구는 광주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추가로 발굴하는 데 힘쓴다는 것이다. 두 기관은 이를 위한 실무위원회도 구성하기로 했다.

지난달 26일 신동훈 광주시장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업무협약식. 광주시청 제공
지난달 26일 신동훈 광주시장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업무협약식. 광주시청 제공
광주 순례길은 총 121.15㎞ 길이로 7개 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1코스인 성지 순례길은 남한산성 순교지에서 시작해 광지원, 조선백자도요지, 신익희 생가, 허난설헌 묘, ‘위안부’ 역사관, 경안천 습지 생태공원, 천진암 성지로 마무리된다. 광주시는 올해 초 일부 구간 실시설계를 완료했고, 균형발전특별회계 보조금 등을 확보해 2025년 완공할 계획이다.

그러자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지난 8일 위원장 도심 스님 명의의 성명을 통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스님들이 청나라와 맞서기 위해 직접 돌을 옮겨 축조한 호국불교의 구심점”이라며 “광주시는 관광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특정 종교 성지화하는 사업 추진을 즉각 취소하라”고 밝혔다. 이어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등 남한산성 주변의 수많은 전통 사찰들이 그같은 승병항쟁의 증인”이라며 “특히 천진암은 스님들이 거주했던 암자로, 천주학을 공부하던 이들을 보호하려다 수십명의 스님들이 처형을 당하고 폐사에까지 이른 곳”이라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불교계와 스님들의 희생은 온데간데없고 남한산성, 천진암 그리고 불교계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조성한 나눔의 집까지 오로지 천주교 성지로만 알려지게 되는 역사 왜곡과 종교 차별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경기도 광주시 불교 암자인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공부했던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권철신 등 천주교 순교자들의 묘.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경기도 광주시 불교 암자인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공부했던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권철신 등 천주교 순교자들의 묘.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이와 관련해 종교 간 갈등과 평화를 다뤄온 엔지오(NGO)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게시판에도 “서소문 역사공원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순교 역사 외에 다른 역사는 배제하는 방식의 가톨릭의 공격적인 선교가 우려된다”는 글이 올라왔다. 천주교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상 1층~지하 4층 4만6천여㎡ 규모의 건물을 짓는 데 국비·시비·구비 596억원을 투입해 서울역 옆 서소문공원을 사실상 ‘천주교 성당 겸 순교자기념관’으로 바꾼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역사학자, 천도교, 시민단체 등이 “서소문공원은 <홍길동전>의 허균과 ‘홍경래의 난’ 가담자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주도자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이 참수되거나 효시된 곳”이라며 천주교 성지화에 반발했는데도, 결국 시민공원을 ‘천주교 성지’로 탈바꿈하는 사업을 강행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상대가 상대인 만큼 천주교도 조심스런 모습이다.

수원교구 관리국장 황현 신부는 “이번 협약은 광주시의 제안으로 시작됐다”며 “처음 논의할 때부터 우리 쪽에서 먼저 불교계의 반발을 우려했으나 광주시가 불교계와 잘 협의해 종교 편향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고 해서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시는 불교계의 반발과 관련해 “남한산성이 조선시대 국방의 보루로서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가치에 광주시도 깊이 공감하고 있고, 천진암이 이번 업무협약으로 천주교 전유물처럼 비춰진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남한산성과 천진암의 불교 관련 스토리와 콘텐츠도 발굴·홍보하고, 광주 순례길을 더욱 더 철저히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학계와 종교계 의견을 반영해 왜곡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3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페르난도 필로니 추기경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계 평화의 성모상’ 축성 봉헌식.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지난 2013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페르난도 필로니 추기경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계 평화의 성모상’ 축성 봉헌식. 천진암 누리집 갈무리
<불교평론> 최근호에 천진암 승려들이 가톨릭 박해자들을 숨겨주다가 참수당한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쓴 이우상 작가는 “천지암에 세워진 거대한 상도 ‘세계 평화의 성모 마리아’ 상이고, 교황도 강복을 통해 ‘온겨레가 화목하길’이라고 했는데, 본인들이 은혜를 입은 사실에 대해 비석 하나 세우지 않고 갈등을 초래한다면 앞뒤가 다른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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